부왜문학(附倭文學)/이원수

기행문 <고도감회>(1943)

밍가 2020. 12. 30. 14:44

고도감회(古都感懷)

-부여신궁(扶餘神宮) 어조영(御造營) 봉사작업(奉仕作業)에 다녀와서

 

이 원 수

 

논산(論山)에서 차를 내린 것은 오전 열 시 백제(百濟)의 옛 서울 부여로 가는 자동차에 몸을 실은 우리 일행은 과일나무와 포도밭이 연달아 있는 탐스런 풍경에 눈을 팔리며 약 한 시간 후 지금은 일 소읍이나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운 역사와 성지(聖地)로서의 빛을 발하고 잇는 산수명미(山水明眉)한 부여 땅에 다었다. 지난 그날의 빛나던 문화도 애끓는 멸망의 비애도 옛 기록에만 남겨놓고 천여 년 동안을 쇠할 때까지 이 땅에 황송하옵게도 은신천황(應神天皇), 재명천황(齋明天皇), 천지천황(天智天皇), 신공황후(神功皇后)의 네 신(神)께서 어진좌(御鎭座)되옵실 관폐대사(官幣大社 부여신궁(扶餘神宮)이 어조영(御造營)되는 것은 반도(半島)의 자랑이요 이천오백만 민중의 기쁨인지라 우리도 이 신궁(神宮) 어조영에 적성(赤誠)을 다하야 괭이를 들고 땀을 흘리며 밤을 새며 찾어온 것이다.

봉사작업단을 맡아 보아주는 반월료(半月寮)에 들어가니 바루 점심 시간이어서 우리 일행은 선착 작업단 이백여 명과 함께 식사에 나갔다.

이 반월료는 봉사작업단만 주시 처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봉사작업단원의 정신적 연성소(鍊成所)며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실천과 황민(皇民)으로서의 결의를 굳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정신(日本精神)을 심장에 새겨 유서 깊은 이 땅, 이 거룩한 신궁 조영 공사에 성한(聖汗)을 흘리는 단원으로 하여금 내선일체의 한 본이 되고 선두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신(神)의 나라니 ?아마데라쓰오호미가미?를 받들어 비롯하야 우리나라를 영구히 두호하시는 여러 ?가미사미?(신양(神樣))로 말미암아 일본은 세계에 유(類)없는 영원의 나라요 끝없이 번영하는 나라인 것을 영확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천삼백 년 전의, 한 집안같이 아름다웁던 내지(內地)와 백제 상호 문물의 교류며 백제가 적국(敵國)의 침범을 당했을 때의, 그 후한 원조와 깊은 정의(情誼) 갖가지 꽃이 난만하게 피였던 이 땅에,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된 우리가 그때 그 흙을 밟는 마음은 감회가 깊다는 한 마듸로 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요생활(寮生活)은 기거(起居)가 모두 연성(鍊成)이요 교(행(行))다. 엄격한 규율 아레서 신의 은혜를 생각하고 신의 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야 여기 들어온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온갖 사회적 지위 신분, 연령, 학력, 직업 등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경건한 봉사자로서 지도에 절대 복종할 것을 맹서한다.

반월료에서는 식사시간도 훌륭한 연성(鍊成)의 시간이었다.

요생(寮生)이 일실에(一室)에 질서 정연히 들어선다. 극히 조심스럽게, 절하고 들어와서는 차례차례 식탁 앞에 서서 일동이 다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식사를 하는 이 방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요, 신(神)께서 머무르시는 곳이어서 신전(神前)이요,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앞과 같은 곳이엇서 이곳은 경건함이 없을 수 없으며 신의 은혜로 해서 내려주신 식사인즉 ××× ×× ××× ×× ×××는 것 같은 무례가 있을 수 없다.

전원 입실이 끝나면 정좌(正坐), 그리고 신전(神殿)에 배례하고 요장(寮長)이 「하라이」(불(祓))를 읽는 동안 무릎 꿇고 머리 숙였다가 「하라이」가 끝나면 식탁에 향해 한번 읍하고 식전송(食前誦)을 왼다.

“たなつもの ももの木草も 天照らす 日の御神の 惠み得てこそ”

(뭍 곡식과 초목들은 날빛 밝으신 해의 신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야만.)

그리고 일박수(一拍手)한 후 “いたべだます”(감사히 먹겠습니다)하고 비로소 저를 든다.

여기서는 그릇을 딸그락거리는 소리도 곁눈질도 잡담도 없다. 반드시 정좌(正座)하야 고요한 가운데서 오직 감사의 염(念)으로서 식사를 마치면 식탁을 정돈하고 식후송(食後誦)을 왼다.

 

“朝夕に もの食ふ每に 豊受の 神の 惠みを 思へ 世の人”

(아침과 저녁 식사하는 때마다 풍년 신의 은혜 생각하라, 이 세상 사람들아)

다음엔 일박수하고 “御馳走さま”(잘 먹었습니다) 한 후 신전(神殿)에 읍하고 조용히 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느끼는 것은 우리들 우리들 가정의 식생활이 얼마나 간소(簡素)와 엄숙과 감사의 정신에 빈(貧)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동시, 평소 내지 식사 양식에 대한 일종의 부러움을 일층 더하게 하는 것이였다.

××으로 ××× 나가××××× 우리는 숙사(宿舍)인 백마료(白馬寮)에서 ‘天の鳥船’ 운동을 했다.

이 ‘도리부네운동’은 라디오 체조 등에 비길 수 없는 굳센 운동이다. 그 엄하고도 열렬한 감투정신과 복중(腹中)에서 우러나오는 듯 힘찬 감성과 육체의 세찬 활동에 누구나 전신에 구슬땀이 솟게 되는 것이다.

“에잇- 에잇-”

“에잇- 에잇-”

큰 배의 노를 젓는 듯, 두 팔을 하전면(下前面)으로 냅다 벋는 동작과 함께 이 의기(意氣)에 찬 고함소리와 사이사이 외이는 애국가사(愛國歌詞)는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씩씩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みたみ吾 生ける しるしあり あめつちの 榮ゆる 時に あへらく 思へば”

(백성된 이 몸 사는 보람 있도다, 하늘과 땅이 번영하는 이 세상 맛난 것을 생각하면-)

“에이 호-”

“에이 호-”

바다를 지키고 바다에 용감할 우리는 진취(進取)의 기상과 옳지 못한 무리를 무찌를 용감이 필요하다.

적의 무리가 돈과 물자를 믿고 덤빈다. 그러나 이는 다 부질업는 망동일 것이다.

위로 천황의 어능위(御稜威)를 받잡고 칠생보국(七生報國)의 적성(赤誠)에 타는 용감무쌍한 우리 국민(國民)에겐 아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다.

뛰는 파도를 헤치고 太平洋이라도 한숨에 건너 가서 못된 무리들을 쳐부시고 참된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요 지금 당장 이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하(下)에 우리들의 가야할 길인 것이다.

적(敵)의 대륙이 멀리 보인다. 자- 힘껏 저어라. 그리하야 용감히 가서 부뒷자- 고 지휘하는 요장(寮長)의 말은 진지한 태도로 계속된다.

“今日よりは かえり見なくて 大君の 醜のみ楯も 出で立つ吾は”

(이제부터는 뒤 돌아보지 않고 이 천한 몸도 놉으신 님의 방패 되여서 나가노라)

다음엔 호흡도 급하게

“에이 사-”

“에이 사-”

눈 앞에 대양의 저 편 적의 뭍이 보인다.

잇는 힘을 다하야 일거에 상륙이다.

에이 사- 소리는 점점 빨라지고 왼몸에는 흡흡하게 땀이 흐른다.

이렇게 하야 한다름에 대양을 건너가는 그 의기와 신체를 함께 단련하는 이 ‘도리부네’ 운동을 우리는 끝까지 기쁨과 긍지를 가지고 마쳤다.

비개인 저녁의 한때를 얻어 우리는 자유시간을 산책 겸 백강료(白江寮) 뒷길을 거닐어 수북정(水北亭)이 건너다 뵈는 백마강까지 가 보았다.

강물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유유히 흘러내리고, 강가의 버들들은 저녁바람에 가만가만 잎사귀들을 흔들고 있다.

수북정 밑으로 조룡대(釣龍臺). 그편으로 건너가는 배다리는 때마침 호우에 떨어지고 없어 건너가기를 단념하고 강가에 머물러 나룻배에 오르내리는 이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수백 년 전 이곳 천십만 장안 사람들이 번잡히 밟았을 이 땅에, 지금 이 자손들은 그날의 기와쪽을 밟으면서 무심히 밭을 갈고 곡식을 심는 것을 볼 제 전하고 싶을 가지가지의 옛일을 저 산과 이 물이 말없고, 부서진 기와 조각이 또한 말 없으니 한많은 옛일을 그 누가 애기해 주랴? 참으로 세월의 흐름이란 기막힌 것이라고 새삼스레 느껴지는 것이었다.

저녁해가 서천(西天) 구름 속에 숨어버리고 황혼빛이 차츰차츰 짙어감에 강 건너 하늘이 붉고 누른 채운(彩雲)의 수(繡)를 놓기 시작한다.

그 붉은 구름, 누른 구름 사이로 새파란 하늘의 그 아름다운 빛깔, 대자연이 꾸며내는 자연미는 사양 없이 강물 속에 흘러내려 수북정 밑의 어둠과 함께 완연히 일대화폭(一大畵幅)을 펼쳐 놓은 듯, 그 장관은 이 땅의 회고의 감회와 함께 어우러져서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시화(詩畵)가 되어 영구히 머릿속에 남어지리라고 생각되었다.

익일 부소산(扶蘇山) 허리 부여신궁(扶餘神宮) 어조영(御造營) 공사장에 나갔다. 이제 기초공사가 거진 완성되여 가는 이 신궁 공사는 크고 넓은 자리와 그 주춧돌만으로도 능히 앞날의 웅장하고 장엄할 신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 고마우신 신궁 어조영의 소식을 듣고 이천오백만 민중이 누구나 여기 땀을 흘려 공사에 힘을 합해 보겠다는 열성을 안 가질 이 없을 것이며, 그 마음으로 여기 와서 봉사작업하고 간 이 또한 많았을 것이다.

우리도 봉사작업에 참가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는 동시 여기 한 덩이 돌이라도 한 부삽의 흙이라도 파고 쌓어 올리는 영광을 가슴 깊이 느꼈다.

작업을 마치고 사적(史蹟) 견학차로 부소산 우거진 숲 사이 서늘한 바람이 한결 돌고 있는 산길을 거닐며 이 신궁이 완성되여 옛날 내선교의(內鮮交誼)에 가장 고마우신 어진념(御軫念)이 계신 응신천황(應神天皇) 외 세 분 제신(祭神)께옵서 어진좌(御鎭座)하시는 날, 이곳의 광휘가 반도강산(半島江山) 방방곡곡에 뻗칠 것을 맘 속에 그려보며 크다란 감격을 느꼈다.

낙화암에 서서 여러 길 밑에 흐르는 백마강물을 굽어보며 백제 멸망의 비극을 성상해본다.

삼천궁녀(三千宮女)의 지는 꽃처럼 떨어져 간 이 바위, 아래를 굽어보기조차 눈이 어지러운 이 바위에서 신마저 벗겨졌을 연약한 발로 황급히 달려나온 궁녀들이, 살아 적군을 만남보다 깨끗이 죽기를 원하고 훨훨 뛰어 까마득한 저 물로 떨어져 갔을 슬픔의 이 바위. 고란사(皐蘭寺)의 유명한 약수로 마른 목을 추긴 후에도, 못잊을 바위인 듯 이번엔 배를 타고 물 위에서 낙화함을 우러러보며 내리다.

사비수(泗沘水) 내리는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 곳에 낙화암 예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업느냐……

 

춘원(春園) 선생의 「낙화암 노래」를 가만가만 읊어보며 물결도 없이 흘러내리는 강물 위에서 “옛날 이 땅의 슬픈 한도 오늘 이 새로운 역사의 출발에서 한 위안을 얻어지이다”고 어디다인지도 모르게 그저 빌고 싶었다.

저녁 후의 백마료는 아침에 새로 들어온 여학생대의 노래로 해서 즐거운 밤이 되었다.

천 리 여로의 피곤도 잊은 듯 백 명 가까운 여학생들은 인솔 선생과 함께 모여 노래로 이 고도(古都)의 한 곳에다 아름다운 음향의 꽃을 피워 놓는다.

그 노래는 경건하고 용감한 의지에 불타는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어가(御歌)였다. 즉 어제 우리들이 ‘도리부네운동’ 때 같이 부른 노래이다.

“みつなつし 久米の子等が 栗生には がみら一本

そ根がもさ そ根芽 つなぎて 擊ちてし止まむ”

(씩씩한 ‘구메’ 사람 조밭 가운데 한 포기 부추 뿌리 그 뿌리 찾아 모조리 파버리듯 격멸코야 말리라)

신무천황(神武天皇)께옵서 어동정시(御東征時), 적으로 하야 어형군(御兄君) 오뢰명(五賴命)께서 전상사(戰傷死)하심을 슬퍼하시며 진중(陣中)에서 부르신이 군가는 지금 신국(神國)의 처녀들이 모여 단정히 꿇어 앉아 신무천황께옵서 ×적(敵)의 ××에 자실 것과 같이 미영격멸(米英擊滅)의 열의에 타는 가슴으로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이다.

“みつみつし 久米の子等が 垣下に 植えし はぢかみ 口ひづく

我は 忘れず 擊ちてし 止まむ”

(씩씩한 ‘구메’ 사람 울타리 밑에 심어논 새양 맛은 맵기도 하다.

그와 가치 잊지 않고 격멸코 말리라)

비록 총을 메고 전장에 나가지 않는 여자일지라도 나라를 지키고 적을 물리치려는 마음엔 사나이와 다름이 없으리라. 가슴들을 한껏 부풀리고 힘차게 부르는 「うちてし止まむ」의 노래는 일본 여성의 용감과 강한 의지를 표하는 것처럼 힘 잇게 요내(寮內)에 울리고, 또 이 부여의 밤하늘에 울려퍼지는 것이었엇다.

우리는 황홀한 가운데 벙어리처럼 앉아서 주린 듯 그 노래소리를 두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노래소리는 그치고 요내(寮內)는 물을 끼얹어진 듯 조용해졌다.

열어놓은 창 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무수한 실가닥처럼 우리들의 방으로 쏟아져 들려왔다.

점호(點呼)도 그치고 자리에 누웠으나 아까 그 노래 소리는 마친 지 오래건만 아직도 그 노래의 의지(意志)가 살아서 백강료(白江寮)를 싸고 돌아 메로듸의 비를 뿌려 주는 듯, 잠드는 우리들로 하여금 신국(神國)의 복된 백성이요, 신국의 앞날을 짊어질 아들과 딸임을 꿈속에서까지 몸으로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 ?반도의 빛(半島の光)? 11월호, 조선금융조합연합회, 1943, 14-16쪽.

(오늘날 맞춤법으로 손질함)

'부왜문학(附倭文學) > 이원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년시 <낙하산>(1942)  (0) 2020.12.31
시 <지원병을 보내며>(1942)  (0) 2020.12.29